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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Louis Lawler: 재해석의 사진가, 루이스 롤러

보통 우리가 유명한 미술품을 만나는 것은 그것들이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하얀 벽위에 전시되어 있을 때고, 집안에 그들을 걸어놨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100억짜리 제프 쿤스의 <토끼>가, 소유자 저택의 냉장고 옆에 놓여있을 때 어떤 모습인지, 또는 부유한 여인이 자신이 소유한 피카소의 조각을 마음대로 손에 쥐고있는 모습이 어떨지 선뜻 그려지지 않는다.

여기서 루이스 롤러(Louis Lawler)라는 여류 사진가가 등장한다. 그녀는 사진가였으며 동시에 큐레이터, 포토 에디터이기도 했다. 롤러는 사진을 찍기위해 작품들을 마음대로 배열하고, 콜렉터들의 집을 방문하며, 옥션하우스를 찾아간다.

루이스 롤러, Pollock and Tureen, Arranged by Mr. and Mrs. Burton Tremaine, Connecticut, 1984
잭슨 폴락의 작품이 수프를 담는 큰 그릇을 놓은 선반위에 걸려있는 모습이다. 롤러는 자주 이렇게 사진에 오렌지빛이 돌도록 찍어서 더욱 옛날 느낌이 나도록 하거나, 따듯하고 다정한 느낌이 들도록 하곤 한다.

미술사학자 Ann Goldstein은 롤러의 이러한 '사용'은 빌리거나 훔친다는 개념이 아니며 독창성이 없기 때문도 아니라고 분명하게 설명한다. Craig Owens는 이러한 사용은 후기 모더니즘의 페미니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루이스 롤러는 저작권과 예술가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재미있게 요리해낸다. 그녀는 자주 과도하게 포장되곤 하는 예술가의 처음 의도를 무시하고, 미술 기관들 사이의 벽을 무너뜨린다. 예를 들면 Jasper Johns가 자신의 작품이 어느집 침실에 걸리기보다 유명 미술관에 가기를 원했었는지 그런것은 로울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현재 작품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 위치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가 그녀에게는 더 중요했다.

롤러는 미술품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다양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여러 방향에서 재해석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art is always a collaboration with what came before you and what comes after you"라고 말함으로 예술가들은 홀로 창작해내는 자들이 아니라 과거 그리고 미래의 작품들과 협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녀 자신 또한 이런 태도로 사진 작품을 찍었다.

루이스 롤러, <Statue before Painting>, 1982
이 사진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중앙동 발코니에서 찍혔다. 앞쪽에 찍힌 것은 Canova의 조각으로,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있는 페르세우스의 모습인데 로울러는 사진 프레임을 그의 페니스에서 잘라버렸다. 다분히 의도적인 연출로, 미술사에서 남성들이 주를 차지하고 있는 점에 대한 의견 표출이었다.

관찰자가 그녀의 사진 속에 있는 물건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을수록 롤러의 사진은 한층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대상이 무엇인지, 사진 속 작품은 얼마인지, 또는 장소가 어디인지 등 어떤 정보라도 도움이 된다. (사실 어떤 작품이든 공부하고 다시 보면 더 많이 보인다. 알면서 나는 왜 안하는것인지 반성...)

금요일

Mariano Vargas: 마리아노 바르가스, 기품과 에로티시즘 사이

마리아노 바르가스 (1960~)는 60년대에 스페인에서 태어난 작가입니다. 2003년에는 런던의 '에로틱 우어워드'에서 올해의 사진작가로 선정되었고, 2005년에는 스페인 어워드에서 선정한 21세기의 100대 사지작가로 유명 에로틱 포토그래퍼가 됩니다.

그의 작품들에는 상의를 벗은 여인들이 나오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 같은 우아함과 기품이 느껴지도록 유도했습니다. 바르가스가 어렸을 적 보티첼리나 레오나르도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그는 자신의 삶을 여성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헌신하기로 했다고 해요. 그의 작품들 속에서 여인들은 과거의 의상을 입고 아슬아슬한 조명 속에 앉아있는데, 그들이 들고 있는 소품은 게임기, 노트북, 카메라 같은 것들입니다. 그녀들의 당당한 태도는 작품을 한층 더 현대적으로 만들죠. 바르가스가 믹스매치한 이러한 요소들이, 작품을 통해서 르네상스를 현대로 소환합니다.

마리아노 바르가스, <Portrait of lady holding a dog>

바르가스의 작품 속 여인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해서, 그는 자주 '외모지상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길거리에서 영감을 주는 여인들이었을 뿐이다 라고 말하며, 그가 사진을 찍는 순간 여성에 대한 그의 환상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의 모델들은 실제로도 아름다울 것 같네요 하핫.)

어떤 명화라도 바르가스의 손을 거치면 한층 짜릿하게 변신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족제비를 안고있는 여인>은 르네상스를 가르치던 교수님께서 모나리자보다 더욱 좋아한다고 하셨던 우아하고 기품있는 그림으로, 그녀의 팔에 안긴 족제비는 여인의 순결을 상징합니다. 이 명화의 재해석이 바르가스의 <Portrait of lady holding a puppy>입니다. 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흰 피부가 붉은 가운과 대비되면서 관능적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분위기의 가운과 로봇강아지의 대비는 혼돈을 주면서 독특함을 형성합니다.

그의 작품은 '플레이보이'지에서도 이슈가 된다고 해요. 바르가스의 작업은 에로티시즘과 우아함, 유혹과 기품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는 것ㅇ 보입니다. 최근에는 그가 작품을 찍는 동영상이 유투브에 공개되었는데, 바르가스가 모델에게 연기를 시키고 세심하고 조명과 소품을 배치하는 모습이 나오니 한번 보셔도 좋을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목요일

Jeff Koons: 제프 쿤스, 베르사이유에 싸구려 장식품을!

제프 쿤스는 2015년에 살아있는 아티스트 중 최고의 10인에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전세계적인 스타로서 유럽 전역에 작품이 퍼져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신세계에서 2011년 Sacred Heart를 구매하면서 펼친 '쿤스 마케팅'으로 많이 알려졌다.

신세계 본관 옥상정원에 설치된 Sacred Heart
신세계는 작품 구매후 머그컵 등의 굿즈를 판매하는 등 예술마케팅을 펼쳤는데, 이후 신세계의 VIP고객 수가 증가했다고 한다. 

지난 20년간 공공 조각품들은 현대미술의 큰 파이를 차지해오고 있다. 예를 들어 시카고의 밀레니엄파크에 위치한 아니쉬 카푸어의 Cloud Gate는 콩쳐럼 생겨서 Bean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며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공공 조각들이 항상 좋은 반응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뉴욕 Lever House에 위치한 데미안 허스트의 Virgin Mother는 보는사람에따라 혐오감을 일으킨다는 의견도 많다. 낙태에 대한 의견을 담은 작품으로 내장과 혈관을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아침마다 출근길에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조금 꺼림칙할수도 있겠다.

이런 공공조각품들의 홍수 속에서 제프 쿤스가 급부상한 것이다. 쿤스는 1991년에 '치치올리나'라는 예명을 쓰는 안나 엘레나 스탈러와 결혼한다. 이 여성은 포르노배우 출신임에도 1987년부터 5년간 이탈리아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전설적인 사람이다. 결혼 후 쿤스는 치치올리나와의 성행위를 조각과 사진으로 묘사한 메이드 인 헤븐 시리즈를 발표한다.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이 예술이라는 명찰을 달고 뉴욕의 소나벤드 갤러리에 등장했을 때 미술계는 스캔들에 휩싸였다. 논란으로 인해 쿤스는 중요한 국제 전시에도 초청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들은 결혼 1년 후인 1992년에 이혼을 하게 되고, 쿤스는 아들 루디비히마저 부인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후에 그는 아들과 키우던 강아지의 모습을 꽃으로 만들어낸 거대 조각 Puppy 를 독일의 Bad Arolsen에 전시한다. 사실은 카셀 도큐멘타에 초대받지 못한 쿤스가 카셀 외곽의 아롤젠에 보란듯이 생화 6만 송이로 만들어진 초대형 강아지 조각을 세운 것인데, 결국 Puppy 는 카셀 도큐멘타보다 주목을 받게 되었다. 순수함이 느껴지는 이 작품은 오스트레일리아, 미국을 돌며 전시된 후 빌바오 구겐하임의 소장품이 되었다.

이후 1999년에 열린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제프 쿤스의 도자기 조각 핑크 팬더가 180만 달러에 미국 출판재벌인 피터 브랜트에게 팔리게 되면서 쿤스는 굉장한 유명세를 타게 된다. 참고로 12년 후인 2011년 5월 소더비의 현대미술 경매에 핑크 팬더가 다시 나왔는데, 전보다 10배가량 높아진 1680만 달러 (약 178억원)에 낙찰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공방이나 공장에서 만들어져서 키치(Kitsch)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싸구려 취향인데 비싼가격으로 유명해졌을 뿐인 작가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도 얻게 된다. 하지만 쿤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있으며 예술은 소통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가격은 옥션 등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합심하여 올린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어찌되었든 이제는 '키치'가 예술의 한 장르로 여겨질 만큼 쿤스의 영향력은 컸다.

2008년 하반기에 제프 쿤스는 베르사이유 궁의 수장인 Jean-Jacque Aillagon에게 초대받는다. 베르사이유에서 일년의 한 명의 현대미술 작가를 초대하여 여는 <Versailles Off>기획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우아한 그림들과 고전적인 조각들로 장식된 화려한 궁전에 제프 쿤스의 풍선이 놓이려하자 걱정이 쏟아졌다. 하지만 요즘 현대미술가들은 이런 이질감을 오히려 즐긴다. 키치한 현대미술과 바로크 건축양식의 만남은 보이는 것처럼 굉장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 냈다. 현재는 너무 많은 미술가들이 이러한 장치를 쓰기때문에 조금 식상할 수도 있겠다.


궁전 내부에 놓여진 Balloon Dog의 모습이다. 어렸을 때 갖고놀던 풍선 강아지 모양으로, 실제 풍선이라면 가볍고 말랑말랑 할 것이다. 하지만 쿤스의 풍선개는 스테인레스스틸로 모양을 잡아서 기존의 무게와 재질에 대한 인식을 비웃는다. 어떤이들은 풍선개의 터질듯한 통통함과 곡선이 에로틱한 느낌을 준다고도 하는데, 난 그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 전시회를 통해서 베르사이유 궁전은 화이트큐브가 정석으로 여겨지고 있는 현대미술관의 개념을 성공적으로 뒤집으며 마리 앙트와네트의 호화로운 공전을 현대 시대로 불러왔다.

덧) 쿤스 전시의 성공에 고무되었는지 2010년 베르사이유에서 비슷한 전시가 또 열리는데, 이때에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가 초대되었다. 무라카미는 환상의 왕국인 베르사이유 궁전이 "나의 정신 속에서 과장과 변형을 통해 비현실적인 세상의 일부가 되어간다"고 말했다. 오타쿠들이 수집하는 애니메이션 피규어같은 작품들을 전시하겠다고 하자, 오픈일에는 프랑스 보수파의 반대 시위까지 열렸다. 품위없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프랑스 권력의 상징인 베르사이유 궁전에 전시되는 것은 프랑스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이며 침입이나 다름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다카시를 블루칩 작가로 만드는데 기여했으며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예술가 반열에 들어서게 했다.

화요일

현대미술관의 기능: 대중에게 다가가는 미술관

미술관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시점은 근대적 공공기관으로서 미술관의 역할이 증대되기 시작한 18세기 중반부터이다. 이전까지 왕과 귀족들의 유일한 권한이었던 예술작품들을 수집하거나 감상하는 행위를 대중들에게 공개하게 되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기 때문이다. 1789년 발생한 프랑스 혁명은 현대적 의미의 미술관 성립과정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다. 그 당시 혁명정부는 왕궁의 모든 소장품을 루브르 궁에 옮겨 일반에게 공개했는데, 그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모든 문화예술품의 공공화라는 이념이었다. 소수보다는 사회 전반의 다수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공공성을 부각시키며 대중에게 다가가는 미술관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차원의 미술관 정책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미술관은 이미 생산된 작품들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공간에서 나아가 대중들을 위한 문화 창출의 공간으로서 더욱 다양한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이에 현재에 와서는 미술관들이 수장작품의 공급과잉으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비판하며 미술관이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미술관학'이 등장했다. 새로운 미술관학은 주변 미술관과의 관계성 부족으로 예술작품의 보관창고 역할밖에 못한다고 지적한다.

과거의 작품 수집과 보관에서 벗어나서, 한마디로 미술관의 존재 의의를 사물이 아닌 사람에 두고 미술관을 사회봉사를 위한 교육적 도구로 개념확대 시키는 것이다. 즉 미술관이 이제 예술품의 공동묘지에서 벗어나서 대중에게 복합 문화를 보급하는 하나의 장소로 기능해야한다는 것이다.

예 1. 퐁피두센터
퐁피두 센터는 건물 내부 전체가 기둥이나 고정된 벽에 제한받지 않아 작품설치를 위한 간이벽이나 각종 구조물들을 자유롭게 설치/분해 가능하다. 퐁피두는 개장당시부터 '시민을 위해 개방된 자유로운 공간' 이라는 개념하에 센터를 중심으로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문화시설을 계획했다. 브랑쿠지 전영 전시관, 현대음악센터, 생메리 성당, 라 퐁텐 이노성트 분수, 남쪽으로는 파리시청과 노트르담 대서당이 퐁피두 주변에 위치해있다. 또 1985년에는 마래 지역에 있던 호텔을 개조하여 피카소 미술관으로 재개관하여 주변 여러 갤러리들과 함께 보브르-마래 지역을 연결한 문화지역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예 2. 테이트 모던
영국은 런던 테이트 갤러리가 1897년부터 자체적으로 다양한 미술전시를 열어오고 있었지만 소장품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건축하게 된다.  (2000년에 테이트 갤러리는 테이트 모던과 테이트 브리튼으로 양분화 되었다.)

테이트 모던이 위치한 사우스워크 지역은 대중의 입장을 고려하며 도시 전체의 균형있는 발전 또한 꾀했다. 예를 들어 개발 당시 강을 남북으로 마주보는 생폴 성당과 테이트모던을 연결하는 보행자를 위한 다리를 건설하여, 도시 중심과 미술관이 직접 연결됨과 동시에 방문객이 산책하는 기분으로 자연스럽게 전시공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미술관 옆에는 셰익스피어 극장, 디자인 뮤지엄 등이 위치하여 강을 따라 새로운 문화지역을 형성하려는 의도 또한 엿볼 수 있다.

미술관을 둘러싼 환경부터 도시 전체의 환경까지 고려하여 도시 자체를 하나의 문화지역으로 자리매김 시키려는 영국의 정책적 의지에서 프랑스 퐁피두 센터와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현대미술관은 독자적 정책 뿐 아니라 주변지역과의 유기적 관계를 고려한 종합적 정책을 동시에 충족시키려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일요일

[정리][발췌] 정창미, "아이웨이웨이의 참여미술 속 풍자와 은유,"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6.

2016년 기준, 아트리뷰 <미술계 파워 100인> 10위에 선정된 아이웨이웨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전체 리스트는 https://artreview.com/power_100/ 에서 볼 수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작가들은 스스로 작품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관람자를 자신의 작품 속에 참여시키기도 한다. 중국의 현대미술가 아이웨이웨이 (1957-)는 동시대 작가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침해 문제를 다룬 사회운동에 동참했으며 이를 작품으로 가시화했다. 그의 작품이 전 세계에서 호응을 얻는 것은 단지 그가 정치,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중친화성을 지닌 그의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작품이 관람자로 하여금 무거운 현실을 직시하게 할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다.

아이웨이웨이는 유년시절 문혁의 혼란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말살된 삶을 경험했고, 미국에서 체류한 12년간 중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지닌 사회 속 모순과 그로 인한 문제들을 직접 체험했다. 그는 뒤샹, 워홀, 긴즈버그 등의 예술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나갔으며 사회 속에서 예술가가 해야 할 역할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2005년 10월 아이웨이웨이는 중국의 포털사이트 시나닷컴(www.sina.com)의 의뢰로 처음 블로그를 시작한다. 그는 블로그를 통해 삶과 예술에 대한 생각, 중국 사회, 정치에 대한 글을 쓰며 불특정 다수의 대중과 교류했다. 2007년 독일 카셀도쿠멘타에 출품한 동화에는 그의 블로그 활동이 큰 영향을 끼쳤다. 동화는 블로그를 통해 작가와 교류한 1001명의 참여자가 만든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아이웨이웨이가 블로그를 통해 모집한 1001명의 참가자는 2007년 6월 12일부터 7월 14일까지 5개조로 나뉘어 각 조당 809일씩 독일의 카셀에 머물렀다. 이 프로젝트는 관람자의 참여를 극대화시켰으며 그 위력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인위적인 기획이 첨부되지 않은 참여미술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어 가는 미술의 새로운 전개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2008년 쓰촨 대지지진사건 이후에는 사건의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하여 블로그에 올렸다. 중국정부가 사건에 대한 명확한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으며 희생자 명단 공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기록된 반체제적 내용의 전파를 우려한 중국정부는 그의 블로그를 강제 폐쇄조치했다. 또 중국정부는 인터넷검열과 차단을 통해 언론의 자유를 억압했고 아이웨이웨이는 이런 중국정부의 '비공개'적 태도에 항거하는 '공개'의 의미로 자신의 누드를 선보였다.

처음에 그는 '반체제인사'라고 불리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2011년 4월에 결국 중국정부에 의해 수감되면서 반체제인사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그의 구속 사유는 경제관련 범죄혐의로 다소 불분명했다. 어쨋든 중국정부는 그를 약 3개월 간 구금했으며, 185만 달러의 벌금형을 내렸다.

아이웨이웨이의 구속은 전 세계의 인권문제로 확산되었으며, 결국 같은해 6월 풀려난 후 1년간 가택연금 되었으며, 4년간 해외출국이 금지되었다. 이 구속 수감 사건은 비록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이었으나, 이후 다양한 작품의 소재를 제공해준 것으로 보인다.

Ai Weiwei, S.A.C.R.E.D., 2013 (installation view, Sant'Antonin Church)
예를들어 2013년 제 55회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아이웨이웨이는 베니스 시내에 위치한 성당에서 자신이 구금 당시 겪었던 상황을 1/2크기의 밀랍인형으로 만든 S.A.C.R.E.D를 선보였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관람자가 감옥을 연상시키는 철 상자의 조그만 창문을 엿보는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현실 속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의 태도와 같다. 따라서 작가는 교회 공산 내에서 나타나는 관람자의 행동가지 작품에 끌여들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는 중국 정부의 모습 뿐 아니라, 이에 대처하는 중국인의 모습 또한 반영한다.

정창미, "아이웨이웨이의 참여미술 속 풍자와 은유,"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6.

금요일

[정리요약] 양지현, 인터렉티브 미디어아트에서 관람객의 참여와 체험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지금까지 미술관이나 화랑은 관람객이 전시되고 있는 예술작품을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공간으로 생각되어져 왔다. 그러나 최근 관람객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제작된 인터렉티브 미디어아트 작품은 이러한 전통저인 개념의 미술관 환경을 관람객의 다양한 지각이나 감각기관을 활용하여 상호작용적으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예술 작품과 능동적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변형하고 있다. 이런 인터렉티브 미디어아트에서 관람객의 참여와 체험은 전통적인 예술작품의 감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게 된다.

Scott Snibble, Boundary Functions, 1998
미디어아트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간단히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미디어'는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마련된 수단을 넘어 인간 사회 전체를 유지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기능을 가진 포괄적인 정보전송 매체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를 소재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는 크게 체험의 범위에서 인터렉티브와 비인터렉티브로 나눌 수 있다. 

미디어 아트에는 Biotech Art, Computer Art, Digital Art, Electronic Art, Interactive Art, Kinetic Art, Multimedia Art, Network Art, Robotic Art, Sound Art, Space Art, Technological Art, Video Art, Web Art 등이 포함됩니다. 미디어 아트의 정의와 개념은 현재까지 정의된 다양한 개념들 이외에 추가로 새롭게 등장하는 매체들을 활용하여 작품이 제작되거나 다른 분야와 융합하는 과정에서 그 정의와 개념이 유동적으로 계속해서 확장된다는 특징이 있다. 

**플럭서스와 미디어아트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한 작가들의 다양한 시도들은 현재 인터렉티브 미디어아트를 구성하는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그 역할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한 존케이지의 4분 33초는 관람객의 참여와 그에 따른 영향을 보여준다. 피아노 앞에 앉은 피아니스트 데이빗 튜더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다가, 피아노 뚜껑을 여닫는 행위로 악장 사이를 구분한다. 일부 관람객들은 아무 음악이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 감정을 표현하지만,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아무것도 연주되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음들과 움직임의 주체가 소음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익숙한 감상방식을 탈피하고 관람객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또, 1960년대 새로운 미술 형태로 널리 통용된 '해프닝'이라는 명칭은 앨런 캐프로가 1959년에 창안한 것으로, 그 해 뉴욕 루벤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를 명명한다. 그해 뉴욕 루벤 화랑에서 열린 여섯 부분으로 나뉜 18개의 해프닝이 10월 4일부터 일주일동안 매일 오후 8시 30분에 열렸다. 캐프로의 작품은 나모토막과 비닐로 세 개의 방과 복도를 구분했는데, 각 방에는 다양한 색과 명암의 조명과 소프터를 비롯해 감상자가 쉴 수 있는 의자가 있다. 캐프로는 일어날 모든 일들ㅇ르 카드에 적어 감상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일정 시간에 각 방의 각 활동에 참여하라고 한다. 

이같이 플럭서스 이벤트와 1960년대 해프닝은 관람객의 참여를 필요로 했지만, 인터렉티브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거나 작업과 관련 맺는것을 장려한다.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 참여자 역할을 하는 오늘날의 예술 활동에서는 컴퓨터, 즉 기술의 역할이 대단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기술의 도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들이다. 기존의 미디어는 결과를 바꿀 수 없지만, 인터렉티브 아트는 관객의 취향에 따라 예술 행위에 변화를 줄 수 있고,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바꾸어 나갈 수도 있다. 즉 관객의 행동이 예술작품에 영향을 줘서 작품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인터렉티브 아트는 유연하고 다양한 창조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작품 설치 비용이 비싸고 기계가 오작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빈번하여 전시 중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목요일

Barnes Foundation.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보석같은 미술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관 Barnes Foundation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Barnes Foundation은 Albert C. Barnes 아저씨가 1925년 자신의 인상주의 콜렉션, 초기 모더니즘 페인팅, 그리고 조각들을 채워서 필라델피아의 약간 외진 곳인 Merion에 지은 미술관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수업으로 갔었는데 다같이 필라델피아까지 간 후, 필라델피아 중심에서 약 한시간 정도 버스를 더 타야 도착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조용한 주택가 중간에 위치한 아름다운 아이보리색 건물이었습니다.


반스파운데이션은 인상주의 작품이라면, 그 어떤 대형미술관보다도 뛰어난 질과 양을 자랑합니다. 이곳은 반스의 집이기도 했으며 교육기관이기도 했습니다. 반스는 "The mission of The BArnes Foundation is to promote the advancement of education and the appreciation of fine arts... to maintain an art gallery of works of ancient and modern art, in connection with an arboretum...for the study of arboriculture and forestry" 라고 말했고,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선대 미술가들의 손놀림, 색감, 빛 등을 직접 눈으로 봐야한다고 믿었습니다. 

보통 미술관에 가면 작품들이 시대별로 걸려있는데, 반스 파운데이션은 이런 시대별/작가별 디스플레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반스는 모딜리아니 페인팅 옆에 아프리카 목각 가면을 걸어둔다던가, 세잔의 정물화에서 보이는 동그라미의 느낌을 반영하는 르누아르의 작품을 걸어두거나, 또 그 옆에는 르누아르의 붉은 드레스 색감이 반사된 듯한 샤댕을 건다던가 하는 독창적이고 직관적인 전시 방식을 택했습니다. 시대별로 나누어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색감과 붓터치같은 느낌을 사람들이 배우길 바랬던거죠.


반스의 콜렉션은 시대를 넘나드는 거장들의 작품을 포함합니다. 루소, 엘 그레코, 반 고흐, 드가, 고야, 고갱, 미로 쿠르베, 모네, 피카소 등 헤아릴 수 없으며 아프리카 미술과 그리스 로마의 도자기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미술관을 모든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들만 볼 수 있게 했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반스는 진심을 다해서 미술을 사랑하고 학구열에 가득 찬 사람들만을 받아들였어요. 초기에는 방문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편지를 써서 방문 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후 사람들의 거센 반항에 못이겨서 결국 금,토,일에는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도록 했으나 그마저도 하루에 400명 이상은 들어갈 수 없으며 반드시 예약을 해야만 했습니다. 티켓은 몇달전에 매진되곤해서 제가 방문했을때도 미리미리 수업을 위한 예약이 되어있었기에 갈 수 있었습니다.

반스는 1951년에 차 사고로 죽었으나 그의 디스플레이와 운영방식을 절대로! 바꾸지 말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하지만 이러한 운영 방식은 현대사회에서 반스파운데이션을 고립시키고 결국 자금난을 겪게 됩니다. 필라델피아 정부는 다운타운을 부흥시키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자금난을 겪고있는 반스미술관을 필라델피아 미술관 옆으로 옮기고자 했습니다. 예술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전을 반대하며 Friends of Barnes Foundation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고소했고 시위성 다큐멘터리 영화 또한 제작되었습니다. 오랜 법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스 파운데이션은 2011년에 완전히 필라델피아 도심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미술관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한 시기니까 어쩔 수 없었나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반스미술관을 둘러싸고있는 주택가의 고요함 또한 미술관을 빛나게 하는 요인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아쉽기도 하지만, 이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반스의 미술품들을 쉽게 볼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로 보아야겠습니다.

Fred Wilson: 미술관 수장고를 마음대로 뒤지다

뉴욕에서 태어난 큐레이터-아티스트 프레드 윌슨은 기관 시설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뉴욕 곳곳의 미술관을 방문하며 자랐고, 뉴욕 자연사박물관을 포함한 많은 박물관의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일했다. 미술관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그는 각 부서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그리고 미술관의 기능은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배울 수 있었다.

따라서 윌슨은 작품을 만들기 전부터 박물관과 미술관 (통칭 뮤지엄)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윌슨은 뮤지엄이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며 그의 작품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고 믿었다. 같은 작품이라도 뮤지엄이 아닌 다른 곳에 전시된다면 사람들은 비판적 시선으로 무장하고 바라볼 것이기 때문에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윌슨의 작품은 Ivan Karp도 말했듯이 '장소특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윌슨은 새로운 것들은 뮤지엄 안으로 들여오는 것보다 이미 그 안에 있는 오브제들을 가지고 일하는 것을 즐겼다. 그가 "뮤지엄은 나의 팔레트다"라고 말했듯이, 그에게 있어 장소적 환경과 오브제의 관계 그리고 그 오브제들이 놓여있는 방식은 매우 중요했다.

1992년에 Maryland Historic Society에서 열린 <Mining the Museum>전시는 그의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윌슨은 일단 Maryland Historic Society의 수장고에 처박혀 있던 물건들을 꺼내와서, 이미 전시되어 있던 작품들과 섞어 재배열했다. 예를 들어 윌슨은 <Mining the Museum>입구에 세개의 '빈' 받침대를 놓고 거기에 메릴랜드 주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던 역사적 중요 인물들의 이름을 써 놓는다. 그 옆에는 세개의 흉상을 놓았는데 이들은 메릴랜드에 영향력이 있었으나 거기서 태어나지는 않았던 인물들이다. 관람자들은 중요 인물들의 동상들이 있어야 하는데 비어있는 공간을 보며, Maryland historic Society가 방치해온 잊혀져가는 역사,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그 자신들을 반성하게 된다.



이 미술관 재발견 프로젝트는 많은 호평을 받았다. 1993년 시애틀 미술관의 요청으로 다시한번 윌슨이 그곳의 방치된 미술품들의 미술품을 이용한 전시를 열었으나, 메릴랜드에서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관람자들이 똑똑해져서 작품의 정당성 없이 한곳에서 흥행했다는 이유로 만들어낸 비슷한 전시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쨋든 메릴랜드에서 프레드 윌슨은 '전시되어 있지 않은 물건들'이 때로는 '전시된 것들' 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관람객들이 그들 스스로의 소홀함에 놀라 역사를 되돌아보며 다시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후 우리슨의 제도비판적 태도와 multiculturalism에 반한 많은 뮤지엄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윌슨은 사실 흑인과 캐리비안 해안의 인디언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인데, 이는 미국에서 가장 천대받는 혈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19세기와 20세기의 인종차별에 대한 전시회를 자주 하는데, 1991년의 <Guarded View>도 그 한 예다. <Guarded View>에서 윌슨은 흑인을 나타내는 4개의 블랙 마네킹을 줄세워놓고 박물관 수위 복장을 입힌다. 그들의 손과 목은 까맣고, 머리 부분은 없다. 미국의 미술관, 박물관에 흑인이나 라틴계 수위들이 대부분이며 백인들은 이런 사실조차 잘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을 꼬집었다. 이처럼 프레드 윌슨은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시각화하여 아직도 현존하는 인종차별이 수면위로 떠오르도록 유도했다.


<Guarded View>는 퍼포먼스로 구현된 적도 있다. 같은해 휘트니미술관의 초청으로 열린 그의 '개같은 인생 (my life as a dog)' 에서 윌슨은 미술관 스탭과 도슨트에게 설명을 해주기 위해 미술관을 방문한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을 먹은 뒤 윌슨은 미술관 수위 옷으로 갈아입고 미술관 한쪽에 서있었다. 이후 겨우 몇시간전에 만난 미술관 관계자들이 나타났지만 아무도 윌슨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 앞을 지나다녔다. 그는 잠시 후 수위 복장인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무존재나 다름없는 흑인 수위들의 현실을 제대로 알려준 제도비판적 퍼포먼스였다.

프레드윌슨은 작품을 통해 오랜시간 변두리로 밀려나 있었던 소수민족의 삶과 무시되어온 유색인종의 위치같은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를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미술관을 변화되어야 하며, 또 그 변화는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준다. 큐레이터-아티스트로서 성공적으로 자신을 포지셔닝한 듯하다.

수요일

Allan Kaprow: 앨런카프로, 미술관 따위라고 말하다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Meyer Shapiro)는 예술가들이 사회를 바꾸는 일에 활발하게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이 '사회적 철학'을 반영해야한다고 믿었으며 모던아트를 산업활동과 비교했다. 앨런 카프로 (Allan Kaprow, 1927~2006)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샤피로의 제자로, 스승이 주장한 '사회철학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여담이지만 카프로는 백남준의 절친이었다고도 한다.

카프로는 미술관이 과거로부터의 '고루한 유적'이라고 조롱했고, 미술관들이 현대 미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현대미술에 있어서 형태보다도 중요한 것은 환경적 요소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오늘날의 미술관들은 비어있어야하며, 대신 그 건물은 '조각'으로 남아 마땅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Allan Kaprow, <Yard>, 1961

처음에 내가 카프로의 작업들을 보았을때, 그것들이 미술관 내에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 혼란을 주었다. 고루한 유적이라고 비판하던 미술관에 어째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했을까? 이중잣대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카프로는 오히려 미술관이라는 환경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는 미술관이라는 환경을 이용하여 그의 작품들이 미술관에 전시되는 '아이러니'를 즐겼다.

카프로는 미술관이 '액션을 위한 대행사'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가끔은 이를 위해 그도 미술관과 타협해야할 때도 있었다. 미술관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직 미술관에 '교육'이라는 큰 기능이 남아있었음을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또 카프로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미술관이라는 환경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예를들어 카프로의 <Happening>시리즈 중 하나인 <Yard>는 미술관에서 "happen"했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수많은 낡은 타이어들을 Martha Jackson 갤러리의 마당에 던져 놓고 사람들이 그 사이를 뛰어다니게 했다. 만일 이 타이어들이 권위 있는 갤러리가 아닌 어떤 사람의 뒷마당에 쌓여있었다면, 쓰레기를 혐오하는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야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갤러리 환경은 카프로의 작품을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대행사'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Allan Kaprow, <Fluids>, 1967/2015

1967년 작품 <Fluids>는 미술관의 벽을 허무는 현대미술의 기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카프로는 LACMA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의 도움을 받아서 파사데나와 엘에이 전역에 20개의 직사각형 블럭들로 네모난 담을 쌓았다. 30x10x8 피트 크기의 얼음 담들이 맥도날드 옆을 포함하여 도시 전역에 만들어졌다.

3일동안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하여 이곳저곳에 만들어진 <Fluids>는 철수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녹도록 디자인 되었다. 크리스토처럼 현대미술의 '일시성'을 강조한 것이다. <Fluids>는 미술관의 '아우라'따위는 상관없다고 외치며, 도시를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여기서도 LACMA 미술관이 카프로의 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일에 '대행사'로 참여했다. 오늘날 미술관들이 이러한 열린 태도로 미술가의 아이디어와 함께한다면, 어렵게 느껴지는 현대미술과 대중 사이의 탄탄한 다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Christo Javacheff: 크리스토의 공공 예술

'공공 미술'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보통은 빌딩 앞이나 아파트 단지 안, 혹은 공원 안의 조각품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들은 흔히 정부나 기업의 의뢰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위치만 공공장소인 현대미술작품 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공공미술품이라면 응당 대중과 좀 더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크리스토를 눈여겨보길 바란다. 크리스토는 흔히 대지미술가로 불리지만, 그의 미술은 공공미술적 특성을 띤다.


위 사진은 크리스토의 <둘러싸인 섬> (1983)을 위에서 본 모습이다. 마치 물위에 떠있는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핑크색 폴리프로폴린 천으로 마이애미의 비스케인 해변에 있는 11개 섬을 둘러싸는 대담한 프로젝트였다. 

보통의 섬과 핑크색천의 섬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일단 후자는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Contemporary Journal과의 인터뷰에서 크리스토는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우는 것과 같다"고 말했는데, 참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프로젝트가 진행되기 전에 이 섬들에는 약 40톤 가량의 쓰레기들이 쌓여있었는데, 크리스토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쓰레기를 모두 치우고 섬들이 green area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사람들도 이 과정을 통해서 이 지역의 환경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크리스토, <Wrapped Trees>, Basel, 1997-1998

크리스토가 프로젝트를 하기로 하는 장소들에는 모두 사람들이 살고있다. 사람들과의 교감과 지지는 그의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 11개 섬을 혼자 힘으로 감싸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두 힘을 합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작품인양 느끼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크리스토는 수동적인 관람자였던 대중의 입장을, 작품 제작에 참여하는 예술가의 위치로 바꾸 놓는데 기여한다. 현대미술사에서 그가 한자리 차지하는 이유 중 하나다. 

프로젝트의 진행에는 지역구 주민을 설득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지역 법률에 위배되는 일이 없도록 체크하는 일까지 포함되어 몇년씩 걸리곤 한다. 하지만 모든 준비를 끝낸 후에 정작 설치부터 전시가 진행되는 기간은 약 2주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프로젝트가 '임시적'이길 원했고, 이에 대해 스미소니언과의 인터뷰에서 크리스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If people want to see my work, they must hurry, because it might not be there if they take their time. My projects are very precious things." 그의 작품들은 마치 어린시절과 같이, 즐길 수 있을때 즐기지 않으면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월요일

Richard Serra: 거부당한 공공미술, 리처드 세라 <기울어진 호>

공공미술 수업에서 실패한 경우로 자주 언급되는 리처드 세라 (Richard Serra, 1939~)의 <기울어진 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1981년, 리처드 세라는 미정부의 Art-in-Artchitecture 프로그램의 요청을 받아 <기울어진 호>를 제작한다. 길이 36미터, 높이 3.6미터의 녹슨 판은 제이콥 재비츠 미연방 빌딩 앞의 광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설치된다. 세라는 "관찰자는 이 작품을 따라 움직이면서 비로소 광장 내 자신의 움직임을 깨닫게 된다. ... 걸음을 뗄수록 조각뿐 아니라 전체 환경이 변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작품의 의미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세워지자마자 사람들의 반발의 부딪히게 된다. 아래 사진과 같이 광장을 가로막고 있으니, 광장을 가로지르고 싶은 바쁜 사람들의 반발도 이해할만 하다.


결국 세라는 철거비 $35,000 + 다른곳으로 옮기는 비용 $50,000을 들여 장소를 옮겨주겠다는 제안을 받게된다. 세라는 이 작품이 '장소특정적(site-specific)'이며, 따라서 "이 작품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이것을 파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광장 주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대중들은 "사람들이 강판위에 그림을 그려서 지저분해질 것이다", "광장의 통행을 방해한다" 혹은 "테러리스트가 방어용으로 쓰는 벽 같다"며 작품의 철거를 계속해서 요구했다.

결국 이 문제는 법원으로 가게되고, 꽤 많은 예술가와 큐레이터들, 그리고 비평가들이 작품의 예술성을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설치 8년만인 1989년에 <기울어진호>는 광장에서 물러나게 된다. 세라는 끝까지 "예술은 사람들이 보기 좋으라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기울어진 호>처럼, 본래 세라가 의도한 장소에 머무르지 못한 작품은 이후에도 또 있었다. 리처드 세라의 <Reading Cones> (1988)은 원래 빌딩 로비에 설치될 예정이었으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것이 염려되어 결국 시카고의 그랜트 파크로 밀려나게 되었다. 좀 더 수요자의 입장이나 장소를 고려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세라의 <기울어진 호>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가만의 예술'을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공공미술은 살아남지 못할것 이라는 선례를 남겼다. 또한, 수동적이었던 관람자들이 법적 공방을 통해서 작품을 광장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더이상 그들이 수동적이지만은 않으며 대중이 공공미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예술가는 그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가 있으나, 대중 또한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요즘에는 - 특히 공공미술에 있어서 - 이 두 권리들의 타협점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세라는 점점 더 유명해졌고, 그의 작품들은 MoMA, LACMA  등 전세계 미술관의 소장품 리스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대중들이 자신의 신념이 확고한 세라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