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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전시공간의 역사적 변천과정과 이유 (르네상스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 한페이지로 이해해보자)

니콜라스 세로타는 2014년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포럼에서, 지금이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 바 있다. 전시 공간은 생각보다 자주 변화하며 발전해왔으며, 이에 대한 역사적 이해 없이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 토론할 수 없다.

전시공간의 역사적 변천 과정은 전시형태를 갖춘 수집체계와 감상의 기능이 등장하기 이전/이후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 전시공간은 문맹이 많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종교적 내용을 시각화하여 보여주고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이를 통해 사회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대중들의 의식을 컨트롤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야 전시 형태를 갖춘 수집체계가 생겨났다. 이때 컬렉션을 수집, 보관하는 공간을 설명하기 위해 gallery, cabinet, studiolo와 같은 용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갤러리는 한쪽으로 창이 있는 긴 회랑을 의미하며, 회화와 조각을 위한 사회적 유희 공간 이었고 캐비닛은 일반적으로 박제동물이나 장식적 오브제로 채워진 작은 사각형 형태의 공간이었다. 스튜디올로는 방같은 형태로, 갤러리처럼 사회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은 아니고 사적인 곳이었다. 갤러리와 캐비닛, 스튜디올로는 뮤지엄의 원형이긴 하지만 전시품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접근이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  즉 수집가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사적 컬렉션이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소장품들이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공공미술관의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공공미술관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었던 계기는 프랑스대혁명(1789)이었다. 당시 등장한 계몽주의가 뮤지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1793년 루브르 박물관 개관으로 이어진다. 예술품이 더 이상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국가의 문화재산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이전에 교회나 궁전에 소장했던 작품들을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선보이는 계기가 된다.

한편 영국에서는 1845년 박물관령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뮤지엄이 하나의 공공기관이며 교육기관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은 전국 뮤지엄을 국가의 비용으로 건설 및 유지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했으며, 산업혁명의 발상지였던 영국은 고무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1851년에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게 된다. 수정궁도 이때 출현한 것이다. 

근대 이후 전시공간은 '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변화하게 된다. (대체로 전시 공간은 미술사의 흐름을 따라 변화한다.) '예술을 위한 에술'을 주장했던 모더니즘 미술은 삶과 예술의 분리를 강조했고, 오직 미적 순수성과 형식주의를 강조했다. 따라서 이렇게 예술의 자율성, 미술 자체의 순수성을 모토로 한 모더니즘 미술에 부응하는 전시공간 또한 그 자체의 삶을 갖는 독립된 세계로 존재하게 되었다. 어떤 맥락에서도 자유로우며 관람자와 미술작품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 미술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화이트큐브'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런 '화이트 큐브' 공간 내부에서 관람자의 눈은 표백(?)된다. 따라서 화이트큐브는 미적인 경험을 극대화/최적화한 물리적 공간으로 기능하면서 모더니즘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Gallery White Cube
그러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진입하면서 변화된 사회의식은 모더니즘 미학을 비판하며 예술이 삶과 통합될 것을 요구했다. 미술계 내에서도 그간의 모더니즘이 미술과 삶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구조였다는 자성적인 비판이 일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장르와 장르사이의 경계를 넘는 작업 뿐 아니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작업에도 관심을 보인다. 계속해서 예술의 위아래를 허물고자하는 시도들이 일어났고, 이는 예술을 일상적인 삶과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접근시키는데 기여했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고정된 한 개념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나도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원성과 상대성 등을 주요 특징으로 들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오히려 모더니즘과의 연관성이나 대조를 통해 그 본질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진다. 논자시에서 썼던 문장을 그대로 쓰네요 ㅋㅋ)

이제 작품은 그 자체로 독립성을 부여받기 보다는 주변 환경과의 관련성을 통해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특히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그리고 공공미술의 대두로 보다 구체화된다. 그 예로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1981)를 들 수 있다. 이들 장르는 작품의 개념이나 사용한 매체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전통적인 작업방식이나 장소성과 같은 주변환경적 요인 그리고 수용자인 관람객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흐름은 기존 미술관의 한계에 도전하며 대중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미술계를 이끌었다. 관람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소통이 강조되면서 상호작용을 통해 화이트큐브의 틀을 허물고자 하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는 곧 전시공간의 권위 해체를 의미한다. 전시공간의 속성은 다변화 되어가고 있으며, 이전과는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시품에 대한 보존이 우선이었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관람자들이 전시의 진행 방향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모더니즘 이후에는 전시공간의 기능 또한 미적 경험의 최대화를 목표로 한 공간이 아니라 문화 교육기관으로 변화하고 있다. 미술관이 관람자와의 소통을 통해 이들의 사회화 작용을 원활히 하려는 노력을 해야하는 사회적 도구의 성격을 띄게 된 것이다. 

물론 모더니즘 전시공간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미술관에서는 여전히 작품이 그 자체로서의 아우라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관장과 큐레이터 등 내부인력이 대중의 반응에 전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며, 전시도 다양한 경험과 해석에 개방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보인다. 

수요일

Christo Javacheff: 크리스토의 공공 예술

'공공 미술'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보통은 빌딩 앞이나 아파트 단지 안, 혹은 공원 안의 조각품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들은 흔히 정부나 기업의 의뢰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위치만 공공장소인 현대미술작품 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공공미술품이라면 응당 대중과 좀 더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크리스토를 눈여겨보길 바란다. 크리스토는 흔히 대지미술가로 불리지만, 그의 미술은 공공미술적 특성을 띤다.


위 사진은 크리스토의 <둘러싸인 섬> (1983)을 위에서 본 모습이다. 마치 물위에 떠있는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핑크색 폴리프로폴린 천으로 마이애미의 비스케인 해변에 있는 11개 섬을 둘러싸는 대담한 프로젝트였다. 

보통의 섬과 핑크색천의 섬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일단 후자는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Contemporary Journal과의 인터뷰에서 크리스토는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우는 것과 같다"고 말했는데, 참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프로젝트가 진행되기 전에 이 섬들에는 약 40톤 가량의 쓰레기들이 쌓여있었는데, 크리스토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쓰레기를 모두 치우고 섬들이 green area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사람들도 이 과정을 통해서 이 지역의 환경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크리스토, <Wrapped Trees>, Basel, 1997-1998

크리스토가 프로젝트를 하기로 하는 장소들에는 모두 사람들이 살고있다. 사람들과의 교감과 지지는 그의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 11개 섬을 혼자 힘으로 감싸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두 힘을 합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작품인양 느끼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크리스토는 수동적인 관람자였던 대중의 입장을, 작품 제작에 참여하는 예술가의 위치로 바꾸 놓는데 기여한다. 현대미술사에서 그가 한자리 차지하는 이유 중 하나다. 

프로젝트의 진행에는 지역구 주민을 설득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지역 법률에 위배되는 일이 없도록 체크하는 일까지 포함되어 몇년씩 걸리곤 한다. 하지만 모든 준비를 끝낸 후에 정작 설치부터 전시가 진행되는 기간은 약 2주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프로젝트가 '임시적'이길 원했고, 이에 대해 스미소니언과의 인터뷰에서 크리스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If people want to see my work, they must hurry, because it might not be there if they take their time. My projects are very precious things." 그의 작품들은 마치 어린시절과 같이, 즐길 수 있을때 즐기지 않으면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월요일

Richard Serra: 거부당한 공공미술, 리처드 세라 <기울어진 호>

공공미술 수업에서 실패한 경우로 자주 언급되는 리처드 세라 (Richard Serra, 1939~)의 <기울어진 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1981년, 리처드 세라는 미정부의 Art-in-Artchitecture 프로그램의 요청을 받아 <기울어진 호>를 제작한다. 길이 36미터, 높이 3.6미터의 녹슨 판은 제이콥 재비츠 미연방 빌딩 앞의 광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설치된다. 세라는 "관찰자는 이 작품을 따라 움직이면서 비로소 광장 내 자신의 움직임을 깨닫게 된다. ... 걸음을 뗄수록 조각뿐 아니라 전체 환경이 변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작품의 의미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세워지자마자 사람들의 반발의 부딪히게 된다. 아래 사진과 같이 광장을 가로막고 있으니, 광장을 가로지르고 싶은 바쁜 사람들의 반발도 이해할만 하다.


결국 세라는 철거비 $35,000 + 다른곳으로 옮기는 비용 $50,000을 들여 장소를 옮겨주겠다는 제안을 받게된다. 세라는 이 작품이 '장소특정적(site-specific)'이며, 따라서 "이 작품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이것을 파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광장 주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대중들은 "사람들이 강판위에 그림을 그려서 지저분해질 것이다", "광장의 통행을 방해한다" 혹은 "테러리스트가 방어용으로 쓰는 벽 같다"며 작품의 철거를 계속해서 요구했다.

결국 이 문제는 법원으로 가게되고, 꽤 많은 예술가와 큐레이터들, 그리고 비평가들이 작품의 예술성을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설치 8년만인 1989년에 <기울어진호>는 광장에서 물러나게 된다. 세라는 끝까지 "예술은 사람들이 보기 좋으라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기울어진 호>처럼, 본래 세라가 의도한 장소에 머무르지 못한 작품은 이후에도 또 있었다. 리처드 세라의 <Reading Cones> (1988)은 원래 빌딩 로비에 설치될 예정이었으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것이 염려되어 결국 시카고의 그랜트 파크로 밀려나게 되었다. 좀 더 수요자의 입장이나 장소를 고려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세라의 <기울어진 호>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가만의 예술'을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공공미술은 살아남지 못할것 이라는 선례를 남겼다. 또한, 수동적이었던 관람자들이 법적 공방을 통해서 작품을 광장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더이상 그들이 수동적이지만은 않으며 대중이 공공미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예술가는 그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가 있으나, 대중 또한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요즘에는 - 특히 공공미술에 있어서 - 이 두 권리들의 타협점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세라는 점점 더 유명해졌고, 그의 작품들은 MoMA, LACMA  등 전세계 미술관의 소장품 리스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대중들이 자신의 신념이 확고한 세라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