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Fred Wilson: 미술관 수장고를 마음대로 뒤지다

뉴욕에서 태어난 큐레이터-아티스트 프레드 윌슨은 기관 시설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뉴욕 곳곳의 미술관을 방문하며 자랐고, 뉴욕 자연사박물관을 포함한 많은 박물관의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일했다. 미술관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그는 각 부서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그리고 미술관의 기능은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배울 수 있었다.

따라서 윌슨은 작품을 만들기 전부터 박물관과 미술관 (통칭 뮤지엄)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윌슨은 뮤지엄이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며 그의 작품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고 믿었다. 같은 작품이라도 뮤지엄이 아닌 다른 곳에 전시된다면 사람들은 비판적 시선으로 무장하고 바라볼 것이기 때문에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윌슨의 작품은 Ivan Karp도 말했듯이 '장소특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윌슨은 새로운 것들은 뮤지엄 안으로 들여오는 것보다 이미 그 안에 있는 오브제들을 가지고 일하는 것을 즐겼다. 그가 "뮤지엄은 나의 팔레트다"라고 말했듯이, 그에게 있어 장소적 환경과 오브제의 관계 그리고 그 오브제들이 놓여있는 방식은 매우 중요했다.

1992년에 Maryland Historic Society에서 열린 <Mining the Museum>전시는 그의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윌슨은 일단 Maryland Historic Society의 수장고에 처박혀 있던 물건들을 꺼내와서, 이미 전시되어 있던 작품들과 섞어 재배열했다. 예를 들어 윌슨은 <Mining the Museum>입구에 세개의 '빈' 받침대를 놓고 거기에 메릴랜드 주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던 역사적 중요 인물들의 이름을 써 놓는다. 그 옆에는 세개의 흉상을 놓았는데 이들은 메릴랜드에 영향력이 있었으나 거기서 태어나지는 않았던 인물들이다. 관람자들은 중요 인물들의 동상들이 있어야 하는데 비어있는 공간을 보며, Maryland historic Society가 방치해온 잊혀져가는 역사,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그 자신들을 반성하게 된다.



이 미술관 재발견 프로젝트는 많은 호평을 받았다. 1993년 시애틀 미술관의 요청으로 다시한번 윌슨이 그곳의 방치된 미술품들의 미술품을 이용한 전시를 열었으나, 메릴랜드에서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관람자들이 똑똑해져서 작품의 정당성 없이 한곳에서 흥행했다는 이유로 만들어낸 비슷한 전시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쨋든 메릴랜드에서 프레드 윌슨은 '전시되어 있지 않은 물건들'이 때로는 '전시된 것들' 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관람객들이 그들 스스로의 소홀함에 놀라 역사를 되돌아보며 다시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후 우리슨의 제도비판적 태도와 multiculturalism에 반한 많은 뮤지엄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윌슨은 사실 흑인과 캐리비안 해안의 인디언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인데, 이는 미국에서 가장 천대받는 혈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19세기와 20세기의 인종차별에 대한 전시회를 자주 하는데, 1991년의 <Guarded View>도 그 한 예다. <Guarded View>에서 윌슨은 흑인을 나타내는 4개의 블랙 마네킹을 줄세워놓고 박물관 수위 복장을 입힌다. 그들의 손과 목은 까맣고, 머리 부분은 없다. 미국의 미술관, 박물관에 흑인이나 라틴계 수위들이 대부분이며 백인들은 이런 사실조차 잘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을 꼬집었다. 이처럼 프레드 윌슨은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시각화하여 아직도 현존하는 인종차별이 수면위로 떠오르도록 유도했다.


<Guarded View>는 퍼포먼스로 구현된 적도 있다. 같은해 휘트니미술관의 초청으로 열린 그의 '개같은 인생 (my life as a dog)' 에서 윌슨은 미술관 스탭과 도슨트에게 설명을 해주기 위해 미술관을 방문한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을 먹은 뒤 윌슨은 미술관 수위 옷으로 갈아입고 미술관 한쪽에 서있었다. 이후 겨우 몇시간전에 만난 미술관 관계자들이 나타났지만 아무도 윌슨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 앞을 지나다녔다. 그는 잠시 후 수위 복장인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무존재나 다름없는 흑인 수위들의 현실을 제대로 알려준 제도비판적 퍼포먼스였다.

프레드윌슨은 작품을 통해 오랜시간 변두리로 밀려나 있었던 소수민족의 삶과 무시되어온 유색인종의 위치같은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를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미술관을 변화되어야 하며, 또 그 변화는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준다. 큐레이터-아티스트로서 성공적으로 자신을 포지셔닝한 듯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