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Louis Lawler: 재해석의 사진가, 루이스 롤러

보통 우리가 유명한 미술품을 만나는 것은 그것들이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하얀 벽위에 전시되어 있을 때고, 집안에 그들을 걸어놨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100억짜리 제프 쿤스의 <토끼>가, 소유자 저택의 냉장고 옆에 놓여있을 때 어떤 모습인지, 또는 부유한 여인이 자신이 소유한 피카소의 조각을 마음대로 손에 쥐고있는 모습이 어떨지 선뜻 그려지지 않는다.

여기서 루이스 롤러(Louis Lawler)라는 여류 사진가가 등장한다. 그녀는 사진가였으며 동시에 큐레이터, 포토 에디터이기도 했다. 롤러는 사진을 찍기위해 작품들을 마음대로 배열하고, 콜렉터들의 집을 방문하며, 옥션하우스를 찾아간다.

루이스 롤러, Pollock and Tureen, Arranged by Mr. and Mrs. Burton Tremaine, Connecticut, 1984
잭슨 폴락의 작품이 수프를 담는 큰 그릇을 놓은 선반위에 걸려있는 모습이다. 롤러는 자주 이렇게 사진에 오렌지빛이 돌도록 찍어서 더욱 옛날 느낌이 나도록 하거나, 따듯하고 다정한 느낌이 들도록 하곤 한다.

미술사학자 Ann Goldstein은 롤러의 이러한 '사용'은 빌리거나 훔친다는 개념이 아니며 독창성이 없기 때문도 아니라고 분명하게 설명한다. Craig Owens는 이러한 사용은 후기 모더니즘의 페미니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루이스 롤러는 저작권과 예술가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재미있게 요리해낸다. 그녀는 자주 과도하게 포장되곤 하는 예술가의 처음 의도를 무시하고, 미술 기관들 사이의 벽을 무너뜨린다. 예를 들면 Jasper Johns가 자신의 작품이 어느집 침실에 걸리기보다 유명 미술관에 가기를 원했었는지 그런것은 로울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현재 작품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 위치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가 그녀에게는 더 중요했다.

롤러는 미술품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다양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여러 방향에서 재해석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art is always a collaboration with what came before you and what comes after you"라고 말함으로 예술가들은 홀로 창작해내는 자들이 아니라 과거 그리고 미래의 작품들과 협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녀 자신 또한 이런 태도로 사진 작품을 찍었다.

루이스 롤러, <Statue before Painting>, 1982
이 사진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중앙동 발코니에서 찍혔다. 앞쪽에 찍힌 것은 Canova의 조각으로,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있는 페르세우스의 모습인데 로울러는 사진 프레임을 그의 페니스에서 잘라버렸다. 다분히 의도적인 연출로, 미술사에서 남성들이 주를 차지하고 있는 점에 대한 의견 표출이었다.

관찰자가 그녀의 사진 속에 있는 물건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을수록 롤러의 사진은 한층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대상이 무엇인지, 사진 속 작품은 얼마인지, 또는 장소가 어디인지 등 어떤 정보라도 도움이 된다. (사실 어떤 작품이든 공부하고 다시 보면 더 많이 보인다. 알면서 나는 왜 안하는것인지 반성...)

금요일

Mariano Vargas: 마리아노 바르가스, 기품과 에로티시즘 사이

마리아노 바르가스 (1960~)는 60년대에 스페인에서 태어난 작가입니다. 2003년에는 런던의 '에로틱 우어워드'에서 올해의 사진작가로 선정되었고, 2005년에는 스페인 어워드에서 선정한 21세기의 100대 사지작가로 유명 에로틱 포토그래퍼가 됩니다.

그의 작품들에는 상의를 벗은 여인들이 나오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 같은 우아함과 기품이 느껴지도록 유도했습니다. 바르가스가 어렸을 적 보티첼리나 레오나르도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그는 자신의 삶을 여성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헌신하기로 했다고 해요. 그의 작품들 속에서 여인들은 과거의 의상을 입고 아슬아슬한 조명 속에 앉아있는데, 그들이 들고 있는 소품은 게임기, 노트북, 카메라 같은 것들입니다. 그녀들의 당당한 태도는 작품을 한층 더 현대적으로 만들죠. 바르가스가 믹스매치한 이러한 요소들이, 작품을 통해서 르네상스를 현대로 소환합니다.

마리아노 바르가스, <Portrait of lady holding a dog>

바르가스의 작품 속 여인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해서, 그는 자주 '외모지상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길거리에서 영감을 주는 여인들이었을 뿐이다 라고 말하며, 그가 사진을 찍는 순간 여성에 대한 그의 환상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의 모델들은 실제로도 아름다울 것 같네요 하핫.)

어떤 명화라도 바르가스의 손을 거치면 한층 짜릿하게 변신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족제비를 안고있는 여인>은 르네상스를 가르치던 교수님께서 모나리자보다 더욱 좋아한다고 하셨던 우아하고 기품있는 그림으로, 그녀의 팔에 안긴 족제비는 여인의 순결을 상징합니다. 이 명화의 재해석이 바르가스의 <Portrait of lady holding a puppy>입니다. 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흰 피부가 붉은 가운과 대비되면서 관능적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분위기의 가운과 로봇강아지의 대비는 혼돈을 주면서 독특함을 형성합니다.

그의 작품은 '플레이보이'지에서도 이슈가 된다고 해요. 바르가스의 작업은 에로티시즘과 우아함, 유혹과 기품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는 것ㅇ 보입니다. 최근에는 그가 작품을 찍는 동영상이 유투브에 공개되었는데, 바르가스가 모델에게 연기를 시키고 세심하고 조명과 소품을 배치하는 모습이 나오니 한번 보셔도 좋을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목요일

전시공간의 역사적 변천과정과 이유 (르네상스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 한페이지로 이해해보자)

니콜라스 세로타는 2014년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포럼에서, 지금이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 바 있다. 전시 공간은 생각보다 자주 변화하며 발전해왔으며, 이에 대한 역사적 이해 없이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 토론할 수 없다.

전시공간의 역사적 변천 과정은 전시형태를 갖춘 수집체계와 감상의 기능이 등장하기 이전/이후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 전시공간은 문맹이 많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종교적 내용을 시각화하여 보여주고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이를 통해 사회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대중들의 의식을 컨트롤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야 전시 형태를 갖춘 수집체계가 생겨났다. 이때 컬렉션을 수집, 보관하는 공간을 설명하기 위해 gallery, cabinet, studiolo와 같은 용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갤러리는 한쪽으로 창이 있는 긴 회랑을 의미하며, 회화와 조각을 위한 사회적 유희 공간 이었고 캐비닛은 일반적으로 박제동물이나 장식적 오브제로 채워진 작은 사각형 형태의 공간이었다. 스튜디올로는 방같은 형태로, 갤러리처럼 사회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은 아니고 사적인 곳이었다. 갤러리와 캐비닛, 스튜디올로는 뮤지엄의 원형이긴 하지만 전시품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접근이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  즉 수집가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사적 컬렉션이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소장품들이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공공미술관의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공공미술관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었던 계기는 프랑스대혁명(1789)이었다. 당시 등장한 계몽주의가 뮤지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1793년 루브르 박물관 개관으로 이어진다. 예술품이 더 이상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국가의 문화재산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이전에 교회나 궁전에 소장했던 작품들을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선보이는 계기가 된다.

한편 영국에서는 1845년 박물관령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뮤지엄이 하나의 공공기관이며 교육기관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은 전국 뮤지엄을 국가의 비용으로 건설 및 유지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했으며, 산업혁명의 발상지였던 영국은 고무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1851년에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게 된다. 수정궁도 이때 출현한 것이다. 

근대 이후 전시공간은 '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변화하게 된다. (대체로 전시 공간은 미술사의 흐름을 따라 변화한다.) '예술을 위한 에술'을 주장했던 모더니즘 미술은 삶과 예술의 분리를 강조했고, 오직 미적 순수성과 형식주의를 강조했다. 따라서 이렇게 예술의 자율성, 미술 자체의 순수성을 모토로 한 모더니즘 미술에 부응하는 전시공간 또한 그 자체의 삶을 갖는 독립된 세계로 존재하게 되었다. 어떤 맥락에서도 자유로우며 관람자와 미술작품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 미술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화이트큐브'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런 '화이트 큐브' 공간 내부에서 관람자의 눈은 표백(?)된다. 따라서 화이트큐브는 미적인 경험을 극대화/최적화한 물리적 공간으로 기능하면서 모더니즘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Gallery White Cube
그러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진입하면서 변화된 사회의식은 모더니즘 미학을 비판하며 예술이 삶과 통합될 것을 요구했다. 미술계 내에서도 그간의 모더니즘이 미술과 삶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구조였다는 자성적인 비판이 일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장르와 장르사이의 경계를 넘는 작업 뿐 아니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작업에도 관심을 보인다. 계속해서 예술의 위아래를 허물고자하는 시도들이 일어났고, 이는 예술을 일상적인 삶과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접근시키는데 기여했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고정된 한 개념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나도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원성과 상대성 등을 주요 특징으로 들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오히려 모더니즘과의 연관성이나 대조를 통해 그 본질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진다. 논자시에서 썼던 문장을 그대로 쓰네요 ㅋㅋ)

이제 작품은 그 자체로 독립성을 부여받기 보다는 주변 환경과의 관련성을 통해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특히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그리고 공공미술의 대두로 보다 구체화된다. 그 예로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1981)를 들 수 있다. 이들 장르는 작품의 개념이나 사용한 매체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전통적인 작업방식이나 장소성과 같은 주변환경적 요인 그리고 수용자인 관람객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흐름은 기존 미술관의 한계에 도전하며 대중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미술계를 이끌었다. 관람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소통이 강조되면서 상호작용을 통해 화이트큐브의 틀을 허물고자 하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는 곧 전시공간의 권위 해체를 의미한다. 전시공간의 속성은 다변화 되어가고 있으며, 이전과는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시품에 대한 보존이 우선이었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관람자들이 전시의 진행 방향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모더니즘 이후에는 전시공간의 기능 또한 미적 경험의 최대화를 목표로 한 공간이 아니라 문화 교육기관으로 변화하고 있다. 미술관이 관람자와의 소통을 통해 이들의 사회화 작용을 원활히 하려는 노력을 해야하는 사회적 도구의 성격을 띄게 된 것이다. 

물론 모더니즘 전시공간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미술관에서는 여전히 작품이 그 자체로서의 아우라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관장과 큐레이터 등 내부인력이 대중의 반응에 전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며, 전시도 다양한 경험과 해석에 개방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보인다. 

수요일

아이패드프로 2세대: 256GB vs. 512GB (일주일을 밤새면서 고민하며 정리한 자료)

아이패드 프로 2세대를 구매하려는데 결정장애가 왔습니다. 분석 덕후인 저는 자료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12.9인치, 스페이스 그레이, wifi+cellular는 결정한 상태고 용량만 결정하면 되는데 이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크기: 10.5형 / 12.9형
연결성: Wifi / Wifi+Cellular
색상: 실버 / 골드 / 스페이스그레이
저장장치: 64 / 256 / 512 ❓

**나의 다른기기 이용상태
일단 저는 노트북으로 맥북프로 500기가를 쓰고있으며, 194.13기가 사용중입니다. (남은 사용가능용량은 195.14GB입니다.) 그리고 핸드폰은 아이폰 6s 128기가 사용중이며 사용가능공간이 22.8기가 남았습니다. (사용한 용량 101.27기가 중 사진이 58기가, 나머지는 다 앱 용량입니다. 노래나 비디오는 스트리밍합니다.) 드랍박스는 1TB중 460기가 사용중이며, 사진 백업은 이곳에 합니다. 아이패드 1세대와 미니는 사고나서 거의 전혀 쓰지 않아서 저장공간 상태를 보는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미니는 얼마전에 리니지레볼루션이라도 돌려볼까하고 꺼내봤더니 너무 느려서 사용이 불가했는데 이건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아이패드프로 이용계획?
현재는 동영상편집 같은걸 할줄 모르지만, 혹시 아이패드 프로에서 여러 앱을 활용하여 쉬운 방법을 찾는다면 한번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가장 크게 기대하고 있는 부분은 가을에 나오는 ios 11입니다. 지금까지는 아이폰이나 패드에서 드랍박스 등에 접속하면 맥북 폴더형식으로 나오지 않아서 사용하기 불편했거든요. 그런데 ios 11에서는 이 부분이 확실히 개선될 것으로 보이며, 멀티윈도우 기능이 개선되어 3개까지 띄울 수 있다는 점도 제게 큰 장점입니다.

아이패드프로는 문서활용에 주로 쓰려고 합니다. 현재 노트북으로 PDF를 읽을때는 밑줄치기만 가능하고 사이드에 손으로 필기하는 것이 불가하거든요. 아이패드프로를 사면 PDF 옆쪽에 손으로 바로바로 필기하고 요약해놓을 수 있어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전 아이패드들도 이런 용도로 쓰고싶어서 샀지만 현재 애플펜슬과 같은 챡 감기는 필기감이 없어서 불가능했어요.

아래는 제가 쓸 용량을 주관적으로 추정해본 것으로, 의식의 흐름대로 쓴거라 그냥 스킵하시고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셔도 될것 같습니다:

아이패드를 산 후에 인터넷이 없어도 항상 사용가능하게 하려면 드랍박스에서 '오프라인에서 액세스 설정'을 활성화시켜야 하며, 오프라인 액세스 가능하게 설정한 폴더는 아이패드의 저장 용량을 차지하게 됩니다. 당연히 드랍박스의 모든 폴더를 오프라인엑세스 시킬것은 아니고, 이 중 가능하면 항상 손안에 쥐고있어야 제 맘이 편한 문서 폴더는 약 65기가입니다 (이 안에 PPT도 포함되어 있으며 간혹 문서와 관련된 짧은 동영상도 함께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2년동안 프로를 사용한다고 했을때 넉넉히 15기가 정도가 문서용으로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노래는 주로 스트리밍이니 항상 돌려듣는 노래만 40개정도 넣고 (10기가) 비디오도 정 심심할 때 볼 몇개만 넣는다 생각하면 15기가정도 차지할 것 같습니다. 12.9인치를 구매할 거라 사이즈가 커서 사진을 찍을 용도는 아니지만 스크린샷을 많이 찍는편이긴 합니다 (현재 아이폰에 스크린샷이 6000개 정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앱 부분입니다. 현재 아이폰 기준으로 앱 사용용량이 43기가입니다. (게임 다 지우고 포켓몬고만 남아있습니다. 뮤나오면 잡으려고....)  따라서 아이패드로 동영상편집같은걸 시도해보고 게임도 받을 것 생각하면 앱이 50기가 정도 잡아먹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결정장애 
종합해보면, 위 용도로만 사용하면 165기가 정도가 사용될 것 같아요. 헌데 이렇게 이것저것 다 계산해보지 않고 학교 동기들이나 친구들에게 256할까 512살까 하면 바로 512!라고 하거나, 살짝 고민하다가 512라는 대답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100이면 100 같은 대답 이었어요. 아이패드 용량은 나중에 늘리는 것이 불가능하니 20만원정도 차이면 그냥 용량 큰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정확히 24만원 차이입니다.)

 여기서부터 제 머리가 터지게 됩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256이 맞는것 같은데, 다들 512를 사라고 하고 (귀얇음) 저도 지금까지는 항상 최대용량 옵션을 선택해왔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고민을 했으면 카카오톡 오픈채팅에 아이패드를 검색해 들어가서 질문해보기도 했어요. 오픈채팅에서는 제가 예상한 사용용량을 말씀드렸더니 256 의견을 주신 분들이 몇몇 계셨고, 이쪽에 좀 지식이 있으셨던 분은 '남은사용용량'이 아이패드의 속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다 합쳐서 150기가 정도라면 256도 괜찮지만 256 중 200기가 이상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면 512로 가도 될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바일 장치에 들어가는 것도 플래시 메모리 이며, 컴퓨터에 들어가는 SSD도 플래시메모리를 병렬로 묶어놓은거라 절반이상 쓰면 느려진다. 안 느려진다는게 말이 안된다'라는 의견이었습니다. (덧붙여서 '하지만 이번부터 아이패드가 고용량을 내놓아서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예측불가하다'는 말도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나서 머리가 더 터지죠? 제가 사용할 듯한 용량은 165인데 그렇다면 512를 사는 경우 의무감을 가지고 200기가 정도를 채워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한 친구는 "그냥 512기가를 사라. 그러나 165도 채우지 말고 최대한 빈 공간을 놔둬라. 내 컴퓨터는 몇TB지만 (기억안남) 나는 여기에 아무것도 저장하지 않는다. 그래야 최대한 빠른 속도로 돌아간다" 라는 강력한 주장을 펼칩니다. 하지만 결정장애가 온 저는 여기서부터 구글검색에 들어갑니다

**맥 루머 포럼 정복
맥 루머 포럼 (https://www.macrumors.com/) 에서는 이미 한창 64기가와 256, 그리고 256과 512기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64기가와 256기가 둘중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64로 가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이 경우 아이클라우드, 나스(NAS), 드롭박스, 구글드라이브 등의 온라인 스토리지를 따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기기 자체에는 어차피 저장을 잘 안하니 64로 가라는 조언들이 보였습니다. '현재 쓰고있는 128기가 아이패드에서도 30기가밖에 못 썼다'라는 의견, '512기가를 아이패드 RAM이 감당하겠느냐'라는 댓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256과 512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달린 댓글에는 512를 구매하라는 조언이 많았어요. 이 경우에는 '4개월 뒤에 용량 모자라서 후회하느니 지금 돈을 더 내겠다', '512가 대수냐 나는 1TB 아이패드를 원한다구!'라는 의견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제 눈에 띈 댓글은 이것이었습니다: "It's not only about how much you use, but the bigger the storage capacity the faster your iPad will perform I highly recommend 512GB to everyone who wants the best iPad experience imaginable." 512를 구매해서 대부분 비워두라는 제 친구나, 오픈채팅에서 조언해주신 분의 의견과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속도는 애초에 RAM과 관련이 있지 저장공간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바보다!'라는 의견도 보았기 때문에, 저는 객관적인 정보를 수집해봅니다.

(개인적인 궁금증) 그런데요 아이폰 느려질 때 통상적으로 추천하는 방법중 하나가 사진이나 앱을 지워서 어떻게든 사용가능용량을 늘리는 것 아닌가요? 이게 맞는 방법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저장공간과 속도/성능이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요. 혹시 정확히 아시는 분 계시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꾸벅)

**실험결과를 찾아보자
유투버 Unbox Therapy는 아이폰7 32GB와 아이폰7 256GB를 함께 퍼포먼스테스트하여 읽기속도와 쓰기속도를 비교하여 영상을 올려두었습니다. (참고로 SSD의 가격차이는 읽기보다 쓰기속도에서 옵니다. 앞에서 썼듯이, 256기가라고하여 256짜리 메모리 한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여러 메모리를 '병렬로' 여러개 사용하기 때문에 용량이 클수록 한번에 처리할 수 있는 '쓰기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 동영상에 따르면, 쓰기속도의 경우 큰 용량인 258기가가 43기가보다 거의 10배나 빠른 속도를 보여주었습니다.

SSD의 경우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는 전체 용량의 10퍼센터 이상을 'wiggle room'으로 남겨두어야한다고 합니다. 데이터가 숨쉴 공간을 마련해주는 건가봐요.

결론적으로 용량 큰게 빠른것은 맞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아마 대부분의 유저들이 체감하기 힘들정도의 차이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256대신 512를 살 이유를 찾고계신 분들에게는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는 요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요?
저는 이미 한국출시 이틀뒤에 제가 사용하는 패턴이나 쓸 용량에 대한 조사없이, 친구들에게 나 뭐살까 너라면 뭐살래 물어봐서 그들에게는 100% 512기가라는 대답을 얻어 그날 바로 공홈에서 512를 질러둔 상태이긴 합니다. 그런데 주문일부터 예상배송일까지 2주일이나 걸린다기에 기다리는 동안 오히려 용량 고민이 생긴 것이지요.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배송일보다 훨씬 빠르게 내일이면 512이 배송될거라는 문자를 받았음에도 결정이 나지않아 글을 써봅니다. 256기가를 쓸 결심이 들면 512를 오픈하지 않고 반품 후 256을 새로 주문할 생각입니다. 이 문장을 쓰는 1초동안에는 512가 약간이라도 빠를테니 그냥 쓰자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2초뒤면 또 다시 바뀔 내 줏대없는 마음..) 아마도 반품이 귀찮기도하고 받아서 빨리 쓰고싶은 맘도 조금 있기 때문이겠죠? 하핫

그래도 아직 고민중인 저에게 댓글로 용량에 대한 조언해주시면 큰 도움 될것같습니다.

Édouard Manet: 마네 <올랭피아> 예술인가 포르노인가

이전 포스팅에서 모네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이번엔 마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이 둘의 이름이 헷갈리신다구요? 다들 한번쯤 그렇습니다 걱정마세요. 간단히 말해서 마네는 모네보다 선배였고, 인물화에 좀 더 강했습니다. 그리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려한 모네와는 달리 마네는 실내(스튜디오)를 선호했습니다.

마네, <올랭피아>, 1863
마네의 <올랭피아>입니다. 이 작품의 모델은 빅토린 뫼랑 (Victorine Meurent) 라는 코르티잔(courtesan)입니다. 코르티잔이란 르네상스 시대의 '고급 기생'을 일컫는 말로, 부자들의 유희 상대였죠. 그 중에서도 빅토린은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 3세의 정부로, 마네가 가장 즐겨 그리던 모델이었습니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마네는 그녀가 보통의 매음녀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가 어릴 적에 우피치 미술관에서 따라 그렸던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차용합니다. 구도로 보나 자세로 보나 마네의 <올랭피아>를 본 전문가들은 이 작품을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여인 또한 티치아노 시대의 유명한 창부였다고 합니다. 화가들은 고급 창부를 모델로 삼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놀랄 일은 아니지요.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비슷하게 그려진 <올랭피아>의 보석이나 커튼, 인테리어 등이 마네의 빅토린을 르네상스 시대로 데려갑니다. 하지만 <우르비노의 비너스>와는 달리 <올랭피노>는 지나치게 노골적이며 창부 그대로의 모습이 느껴진다는 거센 비난을 받게됩니다.

예를 들면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손을 오므리고 숨기는 듯한 포즈를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올랭피아>에는 모델의 손이 그림 정중앙에 "더럽고","두꺼비와 같은 모습으로" 관찰자의 눈을 잡아끕니다. (과격하죠? 제 표현이 아니고 T. J. Clark의 묘사입니다.) 이것은 매우 적극적인 유혹의 제스쳐로 보이며, 당시 남자들이라면 눈살을 찌푸릴만한 행동이었죠. 하지만 혹자들은 <우리비노의 비너스>에서 손가락이 안으로 접혀있는 것은 수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이쪽이 더 에로틱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또 <우르비노>에는 출산능력과 정절을 상징하는 작은 강아지가 발치에서 잠자고 있는 반면, <올랭피노> 발치의 검은 고양이는 성적인 이미지일 뿐더러 프랑스어로 '고양이'와 비슷한 발음의 'chatte'는 창부를 다르게 부르는 단어인 'cocotte'와 형태가 비슷합니다.

더욱이 <올랭피아>는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며 관찰자의 시선에 당당하게 맞섭니다. 마치 '나는 창부이긴 하지만 당신은 내 선택을 받아야만 해!'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주지 않나요? 여성보다 우위에 있어야만 만족을 느꼈던 그 시대의 남자들은 올랭피아가 매우 불편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당시에 쏟아진 비난과 야유는 상상을 초월했지만, 현대에 와서 <올랭피아>는 피카소, 뒤뷔페를 포함한 많은 작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패러디되고 있으니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토요일

Claude Monet: 모네, 사랑을 그리다. (반전 주의)

지금 본다빈치 뮤지엄에서 모네 빛을 그리다: 두번째 이야기 전시가 있다고하여 써보는 모네 포스팅입니다. (전시기간은 2017년 7월 7일부터 2017년 10월 29일까지입니다.)

모네, <산책>, 1875
여인이 양산을 들고 언덕 위에 서있습니다. 꼬마아이는 뒤쪽에서 물끄러미 화가쪽을 바라보고있네요. 공기중 빛의 움직임이나, 드레스의 반짝임 등이 세밀하게 표현되어서 그림 그릴 당시의 따듯하고 행복했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림 속 여인은 모네의 아내 '카미유'이고 꼬마는 아들인 '장'입니다. 카미유는 모네가 무명의 화가로 돈을 벌지 못하고 살림이 힘들었던 시기에도 그를 격려해준 현모양처였습니다. 모네를 위해 어떤 연출이라도 최선을 다해주었던 그녀는 슬프게도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말기 자궁암이었던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모네, <양산을 든 여인>, 1886

이후에 모네가 그린 그림 중에 위 그림과 매우 유사한 작품이 있는데, 유명한 <양산을 든 여인>입니다. 이 그림의 모델은 두번째 부인 알리스의 딸 '수잔'으로, 모네의 의붓딸입니다. 수잔은 카미유가 떠난 뒤 모네의 모델이 되어줍니다. 부인을 모델로 한 <산책> (1875)에는 얼굴이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시선은 올곧이 화가를 향하고 있는 반면, 수잔을 그린 <양산을 든 여인>(1886)에서는 얼굴의 생김새가 생략되었으며 시선은 멀리 왼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이는 모네가 후기로 갈수록 대상의 구체적인 형태를 생략한 경향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왠지 저는 모네가 카미유를 떠올리며 <양산을 쓴 여인>을 그렸는데, 흐릿해진 기억으로인해 얼굴을 자세히 그리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굳이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비슷한 구도와 자세로 <산책>을 그리고자 한것은 카미유가 살아있었던 시기를 그리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보면, 먼 곳을 바라보며 서있는 여인과 바람에 흩날리는 드레스 자락이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반전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로맨틱한 이야기로 끝맺고 싶으시면 이 부분을 읽지않는게 좋아요. 1870년대 후반 프랑스는 불경기였고, 모네의 화상이 파산하여 도망가고 그의 부인인 알리스가 아이들을 데리고 모네의 집으로 오게 됩니다. 소문에 의하면 알리스와 모네는 이후 불륜관계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번 더 반전이 있습니다. 알리스의 딸 '블랑슈'는 이후 모네의 큰아들 '장'과 결혼합니다. 족보가 복잡해지네요.

금요일

Marcel Duchamp: 뒤샹 <샘> 변기를 가져다 예술이라 칭하다

뒤샹, <샘>, 1917
뒤샹은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작품을 걸 수 있도록 해주는 '독립살롱전'에 가명 사인 R. Mutt를 한 쓴 변기를 가져다 놓고 예술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샘>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으로밖에 남아있지 않음에도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까지 평가받곤 한다.

약 100년이 지났음에도, 난 이 작품을 처음 봤을때 화가 날 정도였다. 왜 내가 평소에도 보고싶지 않은 것을 중요한 예술이라면서 배우도록 하는거지? 뒤샹이라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한거야? 라며 반발심이 들었다. 1917년 '독립살롱전'의 심사위원들이라면 나보다 더 당황하며 혹독한 비난을 했을것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변기를 출품하고 뒤샹은 평론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He CHOSE it He took an ordinary article of life, placed it so that its useful significance disappeared under the new title and point of view - created a new thought for that object." 간단히 말해서 그 (R. Mutt)는 일상에서 대상을 '선택'했으며, 새로운 이름과 관점을 부여하며 대상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바로 생각때문에 <샘>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게 된다. 뒤샹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예술가의 '솜씨'가 아니라 '아이디어'였다. 그가 "I don't believe in art. I believe in artists"라고 한것도 작가의 생각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뒤샹은 자신의 아이디어로 관찰자의 상상력을 넓혀주는 자들이야말로 예술가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즉 일상생활 속에서도 예술을 발견해낼 줄 아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뒤샹은 <샘>을 통해 미술관에 전시해 놓기만 하면 '아 고상하고 위대한 미술품인가보다'하고 무조건적으로 경이롭게 바라보는 관람자의 태도를 조롱한다. <샘>을 보면서 과연 나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미술은 이후 '개념 미술'이라고 불리게 된다.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1912
뒤샹의 이런 기이한 행동은 그가 이미 1912년에 내놓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로 유명해진 이후라 더 주목받은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당시 발명된 초고속 카메라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이 작품은 1912년 파리 살롱에 출품했으나 너무 파격적이라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대처할줄을 몰랐다고 한다. 뒤샹은 작품을 회수하여 이듬해 뉴욕의 '현대미술 국제전시회'에 출품했고, 그곳에서 호평을 받으며 유명해지게 된다.

많은이들은 이 사건 이후 현대미술의 주무대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넘어왔다고 말한다. 역시 변화를 두려워하면 문화의 중심지로 남아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목요일

Jeff Koons: 제프 쿤스, 베르사이유에 싸구려 장식품을!

제프 쿤스는 2015년에 살아있는 아티스트 중 최고의 10인에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전세계적인 스타로서 유럽 전역에 작품이 퍼져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신세계에서 2011년 Sacred Heart를 구매하면서 펼친 '쿤스 마케팅'으로 많이 알려졌다.

신세계 본관 옥상정원에 설치된 Sacred Heart
신세계는 작품 구매후 머그컵 등의 굿즈를 판매하는 등 예술마케팅을 펼쳤는데, 이후 신세계의 VIP고객 수가 증가했다고 한다. 

지난 20년간 공공 조각품들은 현대미술의 큰 파이를 차지해오고 있다. 예를 들어 시카고의 밀레니엄파크에 위치한 아니쉬 카푸어의 Cloud Gate는 콩쳐럼 생겨서 Bean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며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공공 조각들이 항상 좋은 반응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뉴욕 Lever House에 위치한 데미안 허스트의 Virgin Mother는 보는사람에따라 혐오감을 일으킨다는 의견도 많다. 낙태에 대한 의견을 담은 작품으로 내장과 혈관을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아침마다 출근길에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조금 꺼림칙할수도 있겠다.

이런 공공조각품들의 홍수 속에서 제프 쿤스가 급부상한 것이다. 쿤스는 1991년에 '치치올리나'라는 예명을 쓰는 안나 엘레나 스탈러와 결혼한다. 이 여성은 포르노배우 출신임에도 1987년부터 5년간 이탈리아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전설적인 사람이다. 결혼 후 쿤스는 치치올리나와의 성행위를 조각과 사진으로 묘사한 메이드 인 헤븐 시리즈를 발표한다.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이 예술이라는 명찰을 달고 뉴욕의 소나벤드 갤러리에 등장했을 때 미술계는 스캔들에 휩싸였다. 논란으로 인해 쿤스는 중요한 국제 전시에도 초청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들은 결혼 1년 후인 1992년에 이혼을 하게 되고, 쿤스는 아들 루디비히마저 부인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후에 그는 아들과 키우던 강아지의 모습을 꽃으로 만들어낸 거대 조각 Puppy 를 독일의 Bad Arolsen에 전시한다. 사실은 카셀 도큐멘타에 초대받지 못한 쿤스가 카셀 외곽의 아롤젠에 보란듯이 생화 6만 송이로 만들어진 초대형 강아지 조각을 세운 것인데, 결국 Puppy 는 카셀 도큐멘타보다 주목을 받게 되었다. 순수함이 느껴지는 이 작품은 오스트레일리아, 미국을 돌며 전시된 후 빌바오 구겐하임의 소장품이 되었다.

이후 1999년에 열린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제프 쿤스의 도자기 조각 핑크 팬더가 180만 달러에 미국 출판재벌인 피터 브랜트에게 팔리게 되면서 쿤스는 굉장한 유명세를 타게 된다. 참고로 12년 후인 2011년 5월 소더비의 현대미술 경매에 핑크 팬더가 다시 나왔는데, 전보다 10배가량 높아진 1680만 달러 (약 178억원)에 낙찰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공방이나 공장에서 만들어져서 키치(Kitsch)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싸구려 취향인데 비싼가격으로 유명해졌을 뿐인 작가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도 얻게 된다. 하지만 쿤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있으며 예술은 소통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가격은 옥션 등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합심하여 올린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어찌되었든 이제는 '키치'가 예술의 한 장르로 여겨질 만큼 쿤스의 영향력은 컸다.

2008년 하반기에 제프 쿤스는 베르사이유 궁의 수장인 Jean-Jacque Aillagon에게 초대받는다. 베르사이유에서 일년의 한 명의 현대미술 작가를 초대하여 여는 <Versailles Off>기획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우아한 그림들과 고전적인 조각들로 장식된 화려한 궁전에 제프 쿤스의 풍선이 놓이려하자 걱정이 쏟아졌다. 하지만 요즘 현대미술가들은 이런 이질감을 오히려 즐긴다. 키치한 현대미술과 바로크 건축양식의 만남은 보이는 것처럼 굉장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 냈다. 현재는 너무 많은 미술가들이 이러한 장치를 쓰기때문에 조금 식상할 수도 있겠다.


궁전 내부에 놓여진 Balloon Dog의 모습이다. 어렸을 때 갖고놀던 풍선 강아지 모양으로, 실제 풍선이라면 가볍고 말랑말랑 할 것이다. 하지만 쿤스의 풍선개는 스테인레스스틸로 모양을 잡아서 기존의 무게와 재질에 대한 인식을 비웃는다. 어떤이들은 풍선개의 터질듯한 통통함과 곡선이 에로틱한 느낌을 준다고도 하는데, 난 그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 전시회를 통해서 베르사이유 궁전은 화이트큐브가 정석으로 여겨지고 있는 현대미술관의 개념을 성공적으로 뒤집으며 마리 앙트와네트의 호화로운 공전을 현대 시대로 불러왔다.

덧) 쿤스 전시의 성공에 고무되었는지 2010년 베르사이유에서 비슷한 전시가 또 열리는데, 이때에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가 초대되었다. 무라카미는 환상의 왕국인 베르사이유 궁전이 "나의 정신 속에서 과장과 변형을 통해 비현실적인 세상의 일부가 되어간다"고 말했다. 오타쿠들이 수집하는 애니메이션 피규어같은 작품들을 전시하겠다고 하자, 오픈일에는 프랑스 보수파의 반대 시위까지 열렸다. 품위없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프랑스 권력의 상징인 베르사이유 궁전에 전시되는 것은 프랑스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이며 침입이나 다름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다카시를 블루칩 작가로 만드는데 기여했으며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예술가 반열에 들어서게 했다.

화요일

현대미술관의 기능: 대중에게 다가가는 미술관

미술관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시점은 근대적 공공기관으로서 미술관의 역할이 증대되기 시작한 18세기 중반부터이다. 이전까지 왕과 귀족들의 유일한 권한이었던 예술작품들을 수집하거나 감상하는 행위를 대중들에게 공개하게 되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기 때문이다. 1789년 발생한 프랑스 혁명은 현대적 의미의 미술관 성립과정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다. 그 당시 혁명정부는 왕궁의 모든 소장품을 루브르 궁에 옮겨 일반에게 공개했는데, 그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모든 문화예술품의 공공화라는 이념이었다. 소수보다는 사회 전반의 다수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공공성을 부각시키며 대중에게 다가가는 미술관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차원의 미술관 정책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미술관은 이미 생산된 작품들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공간에서 나아가 대중들을 위한 문화 창출의 공간으로서 더욱 다양한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이에 현재에 와서는 미술관들이 수장작품의 공급과잉으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비판하며 미술관이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미술관학'이 등장했다. 새로운 미술관학은 주변 미술관과의 관계성 부족으로 예술작품의 보관창고 역할밖에 못한다고 지적한다.

과거의 작품 수집과 보관에서 벗어나서, 한마디로 미술관의 존재 의의를 사물이 아닌 사람에 두고 미술관을 사회봉사를 위한 교육적 도구로 개념확대 시키는 것이다. 즉 미술관이 이제 예술품의 공동묘지에서 벗어나서 대중에게 복합 문화를 보급하는 하나의 장소로 기능해야한다는 것이다.

예 1. 퐁피두센터
퐁피두 센터는 건물 내부 전체가 기둥이나 고정된 벽에 제한받지 않아 작품설치를 위한 간이벽이나 각종 구조물들을 자유롭게 설치/분해 가능하다. 퐁피두는 개장당시부터 '시민을 위해 개방된 자유로운 공간' 이라는 개념하에 센터를 중심으로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문화시설을 계획했다. 브랑쿠지 전영 전시관, 현대음악센터, 생메리 성당, 라 퐁텐 이노성트 분수, 남쪽으로는 파리시청과 노트르담 대서당이 퐁피두 주변에 위치해있다. 또 1985년에는 마래 지역에 있던 호텔을 개조하여 피카소 미술관으로 재개관하여 주변 여러 갤러리들과 함께 보브르-마래 지역을 연결한 문화지역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예 2. 테이트 모던
영국은 런던 테이트 갤러리가 1897년부터 자체적으로 다양한 미술전시를 열어오고 있었지만 소장품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건축하게 된다.  (2000년에 테이트 갤러리는 테이트 모던과 테이트 브리튼으로 양분화 되었다.)

테이트 모던이 위치한 사우스워크 지역은 대중의 입장을 고려하며 도시 전체의 균형있는 발전 또한 꾀했다. 예를 들어 개발 당시 강을 남북으로 마주보는 생폴 성당과 테이트모던을 연결하는 보행자를 위한 다리를 건설하여, 도시 중심과 미술관이 직접 연결됨과 동시에 방문객이 산책하는 기분으로 자연스럽게 전시공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미술관 옆에는 셰익스피어 극장, 디자인 뮤지엄 등이 위치하여 강을 따라 새로운 문화지역을 형성하려는 의도 또한 엿볼 수 있다.

미술관을 둘러싼 환경부터 도시 전체의 환경까지 고려하여 도시 자체를 하나의 문화지역으로 자리매김 시키려는 영국의 정책적 의지에서 프랑스 퐁피두 센터와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현대미술관은 독자적 정책 뿐 아니라 주변지역과의 유기적 관계를 고려한 종합적 정책을 동시에 충족시키려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월요일

진짜 솔직한 입술 필러 후기 (이주 뒤 경과)


입술 필러 전
정말 솔직한 입술 필러 후기를 써보려고합니다. 일단 위 사진은 필러 맞기 전 입술입니다. 원래도 입꼬리는 올라간 편이었는데, 입술 두께가 얇아서 한번 맞아봤습니다. 시술 자체는 별거 아닌데, 특별히 입술이 막 이상하다고까지 생각은 안 들어서 오히려 이상해질까봐 망설였었어요. 근데 피부과 간날 갑자기! 저질러 버렸습니다. 골든뷰나 로렌 등 입술필러로 유명한 곳도 많지만, 전 원래 다니던 피부과에서 받은거라 몇cc 이런건 정하지 않고, 넣어보고 또 리터치 하는 식으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입꼬리를 올리려는 분들은 보톡스를 병행한다고 하는데 저는 필러로만 넣었어요.

입술 필러 당일
워낙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시는 원장님이라서, 통통하게 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당일에는 붓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붓기있는 이 날이 가장 입술모양이 예뻤어요. 이 정도로 유지되길 바랬는데 급격히 빠지더라구요.

멍은 들었지만 사진에도 안 보일정도로 크게 심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일 있으신 분들은 진한 립스틱 바르면 안 보이구요. 보통 입술 필러는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더라구요.

엄청 아프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것 같은데, 저는 참을만 했어요. 아예 안 아픈건 아니지만, 마취크림 바르고 한참 있다가 맞으면 따끔 따끔한 정도로 생각보다 안 아픕니다. 절대 이상할 정도로는 안 넣어주시는 원장님이라 그런지, 입술 트는것도 없었어요.

아무리 과해도 괜찮다 환자가 말씀드려도 의사 본인의 미적 기준이 쉽게 바뀌지는 않기 때문에, 더 극적인 효과를 원하시는 분은 그런 병원을 찾아서 가시는게 만족도가 높으실 거예요. 전 처음 해본거라서 괜찮을지 걱정되는 마음이 반이었기 때문에 이정도로 만족했습니다.

주의사항으로는, 필러 맞고 3일정도는 음주나 흡연을 삼가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차피 흡연을 안해서 상관없었어요. 그리고 처음에는 이물감이 좀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되고 괜찮아요. 딱딱하진 않지만 살짝 뭉친 느낌이 들텐데, 손으로 막 누르지 말고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리터치 일주일 후 #생입술
처음에 시술받고 바로 다 없어져서, 리터치 때 더 통통하게 넣어달라 했더니 보통 리터치 때 넣는것보다 더 넣었다고 하셨어요. 주사 후 원장님이 조물조물 만져서 잘 펴주시는데도, 하루이틀 지나고보니 크게 웃으면 아랫입술이 좀 비대칭이었는데 귀찮아서 그냥 뒀습니다. 어차피 금방 빠지면서 대칭이 되더라구요.

리터치 2주 후 (립스틱 바름)
아직까지 이물감은 있지만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 정도입니다. 필러가 잘 빠지는 체질인지 어느새 얇아지려는 기미가 보이는 것 같네요. 그래도 시술 전보다는 살짝 도톰해진 것 같은게, 일단 전에는 입술이 얇아서 그라데이션 하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통통해지면서 입술 주름이 펴져서 그런지 그라데이션이든 풀립이든 립스틱이 슥슥 잘 발립니다. 붓기있을 때처럼 도톰하게 유지되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제 욕심이겠죠. 위험도 없고 가격도 비싸지 않으니 가격 대비 추천입니다.